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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완 신임 과기정통부 정보통신산업정책관
'휠체어 탄 고위공무원 1호'로 기록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무원이 '공직의 꽃'이라고 불리는 국장 자리에 올랐다.
주인공은 박태완 신임 과기정통부 정보통신산업정책관. 초등학교 때부터 휠체어를 탄 1급 장애인이지만 기동력은 자타공인 과기정통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성격이 급해서라고 이유를 댔지만, 그는 과기정통부 내에서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관례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박 국장은 "일이 있으면 '내가 하고 말지'라며 먼저 해버리는 게 편하다. 협의 대상인 타 부처든 기업이든 관계자를 이왕이면 직접 가서 만나는 게 성의 있지 않으냐"며 겸연쩍게 말했다.
그가 새로 맡은 임무는 산업국장으로도 불리는 직책으로, 정보통신기술(ICT) 수출을 진흥하고 업계와 합을 맞춰 기술 산업화를 위한 연구개발에 발 벗는 자리다.
박 국장은 국가의 '혈관' 역할을 하는 통신망에서도 역사적 이벤트를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그가 정보통신방송기술정책과장이었던 2019년 4월 3일은 한국이 미국을 간발의 차이로 앞질러 '세계 최초 5G 이동통신 개통'의 타이틀을 쥔 날이다.
박 국장은 "우리나라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 때부터 글로벌 통신 기술을 선도했는데 차세대 통신을 준비할 때 주도권을 쥐는 것이 정말 중요했고 여전히 중요하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요즘 주목받는 인공지능(AI) 기술의 인프라인 데이터센터가 구축되더라도 연결을 위한 통신 기술력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 때까지 만져보지도 못했던 컴퓨터에 관해 공부하는 부산대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다.
'비장애인과 경쟁해야 한다'는 부모님 철학에 따라 학창 시절 내내 일반 학교에 다녔고 저학년 때는 부모님이 업어서, 고학년 때부터는 휠체어를 밀어주며 뒷바라지했다.
대학 때부터는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20㎏에 달하는 휠체어에 탄 그를 들어 올려준 학우들이 큰 버팀목이 됐다.
1996년 대학원에 입학해서는 당시 공상과학 소설 외에는 잘 언급도 안 되던 AI를 전공했다.
박 국장은 "4학년 때 AI 프로그래밍 수업을 들었는데 재미있어서 매달리다 보니 A 플러스 학점을 받았고 석사 전공까지 이어지게 됐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겸손일 뿐 AI 역량에서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계기가 됐다.
진대제 전 장관 시절 소프트웨어 진흥 정책을 맡으면서 진행한 '플래그십 프로젝트' 중에 가장 큰 빛을 본 것이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국내 최초 개발한 국산 초음속 항공기 'T-50'의 소프트웨어 국산화 지원이었다.
2009년 지식경제부 정보통신산업과 모바일 담당 사무관이던 시절에는 아이폰 3GS가 국내에 처음 도입됐다.
'스마트폰 종합 대책'을 만들라는 지시에 사비로 아이폰을 사서 2주간 밤새 써보면서 국내 통신 정책의 대응 방안을 고민했다.
비장애인 직원들도 업무가 몰릴 때는 체력적인 한계를 토로하는 터라,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으냐고 물었다.
그는 "체력적으로 약한 것 같지는 않다"며 웃었다.
다만, 그와 함께하는 업무적인 식사·미팅 장소를 잡을 때 엘리베이터 유무를 꼭 확인하고 예약해야 하는 불편을 기꺼이 감수해주는 상사와 동료 직원들에게 고마운 마음은 크다고 했다.
지켜봐 준 아내와 두 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박 국장은 장애인으로 고위직 진출을 꿈꾸는 이들에게 "몸이 불편하니 '이건 그냥 봐줬으면' 하는 마음가짐보다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가 2002년 기술고시로 공직에 입문했을 때만 해도 '맡긴 일을 해낼 수 있을까'라는 시선이 있었지만, 다른 사무관처럼 밤을 새워야 할 때 새고, 급하게 보고서를 쓰라면 쓰고 하다 보니 평가는 자연스레 좋아지더라는 경험담에서다.
그는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거창한 목표보다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는 것, 공무원으로서 잘 퇴직하는 게 목표"라고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