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장애인의 시설 접근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는지를 두고 대법원에서 공개 변론이 열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김모 씨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차별 구제 소송의 공개 변론을 23일 오후 2시 대법정에서 열었다.
이번 소송의 쟁점은 국가가 옛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을 장기간 개정하지 않은 것이 입법자의 부작위(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로서 위법한지, 나아가 손해배상 책임까지 성립하는지 여부다.
옛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은 편의점, 약국, 식당 등 소규모 소매점 중 바닥면적 합계 300㎡ 이상인 곳에만 경사로 등 장애인 편의 시설을 설치할 의무를 부여했다. 이 시행령은 1998년부터 2022년까지 유지됐다.
그러나 바닥면적 합계가 300㎡를 넘는 편의점은 전국 편의점 중 3%에 불과해 장애인의 접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정부는 2022년 4월에야 '바닥면적 합계 50㎡'로 조건을 강화했다.
원고 측은 "바닥면적 300㎡ 이상에 이르는 소매점은 거의 없다. 시행령이 만들어진 98년부터 20여년간 통계를 보면 0.1%에서 5% 남짓"이라며 "입법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헌법상 기본권에 해당하는 접근권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부 측은 "부족하나마 정부는 장애인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며 "이 사건 쟁점 규정과 관련해 구체적인 행정입법 부작위와 위법성, 고의나 과실이 인정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정부 측 대리인은 간이용 경사로가 안정적이거나 효과적이지 않고, 지체장애인에게 온라인 구매 등 여러 대체 수단이 마련되어 있다는 논리도 펼쳤다.
이를 두고 오경미 대법관은 "온라인 주문으로 대체 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장애인에게 집에만 있으면서 온라인만 하라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바닥면적 300㎡ 이상 시설이 실제로 전국에 얼마나 되는지 양쪽에 물었다. 원고 쪽은 약 3%, 피고 쪽은 5%는 넘는다고 답했다.
조 대법원장은 이를 두고 "법에서 요구하는 시설물에 대해 50% 이상이라도 해놓고 우리는 할 만큼 했다고 해야 한다"며 "이 정도라면 너무나 입법 의무를 게을리한 것이 숫자 자체로 명백한 것이 아닌가"라고 의문을 표했다.
정부의 부작위가 인정된다면 손해를 배상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양쪽은 대립했다.
원고 측은 "1인당 100만원, 그보다 적은 10만원이라도 손해배상이 인정돼야 한다"며 "국가 재정 문제로 배상책임 자체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반면 정부 측은 접근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침해됐는지 불분명하고 관련 제도를 유지·개선하는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들의 과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와 한국지체장애인협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정부가 시행령을 장기간 개정하지 않은 게 위법이라는 의견을 서면으로 냈다.
대한변호사협회와 한국사회보장법학회는 나아가 장애인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도 인정된다고 회신했다.
이날 변론에는 한국환경건축원 및 한국장애인개발원 관계자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명도 참고인으로 출석해 각각 의견을 개진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변론에 앞서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평등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법규정으로 인해 장애인의 접근불가 시설은 늘어만 갈 것"이라며 "책임을 엄중히 묻는 재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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